Commodity에서 Identity로, Identity에서 Ideology로, Ideology에서 Superology로
시즌1 / Vol.12 슈퍼내추럴 코드 (2009년 11월 발행)
카메라 보급률 80%의 시대. 각 제조사는 ‘플라스틱과 유리의 조합으로 카메라(commodity)’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브랜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름을 갖게 된 카메라(identity)’는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는 그들과 함께 가치관을 공유하는 ‘친구 혹은 동반자로서의 카메라(ideology)’가 되었다. 이 카메라 브랜드들은 마니아들과 함께 ‘그들만의 Superology’에 젖어, 슈퍼내추럴 현상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국내 디지털 카메라 보급률은 지난 2007년만 해도 73.7%(한국갤럽 & 프로슈머)를 기록했다. 지난 2년간, 당신 혹은 당신의 주변인들 중 새로이 디지털 카메라를 구매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다면 보급률 수치가 어느 정도 증가했을지 예상될 것이다. 보급률과 동시에 증가된 것은 디지털 카메라 브랜드 종류, 그리고 브랜드별 기종 수다.
기종 수가 증가한다는 것은 한 브랜드 내 상품들이 더욱 짧은 수명 주기를 갖게 되었음을 뜻하며, 많아진 상품 수만큼 시장은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러한 시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시장 점유율 측면에서) 니콘과 캐논이다. 말 그대로 ‘대세’ 카메라다. 하지만 이러한 주변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그리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거부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유지하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카메라 브랜드들이 있다.
그 중 펜탁스, 리코, 올림푸스, 그리고 라이카 마나아들에게 그들은 왜 ‘대세’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마이너(minor)’임을 자처하는지 물었다. 수학 문제의 정답처럼 명쾌한 증명 과정이나 명확한 답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브랜드 안에서도 각기 다른 개인적 코드로 그 브랜드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이번에 만난 9명의 마니아들의 대답에서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코드가 있다면, 자신이 선택한 그 브랜드가 걸어온 길을 찬양하고 있으며,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에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 줄 의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각각의 마니아들은 해당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지지(support)’하는 군중(그 규모에 관계없이)의 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들은 왜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마르크스의 사상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2차 대전 이후 ‘대립’이나 ‘갈등’이라는 단어와 함께 자주 등장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는 다소 부정적인 느낌이 있다. 하지만 어원을 따져 보자면 ‘이데아(idea)’와 ‘로직(logik)’이라는 두 의미가 합쳐진 것으로서, ‘한 대상의 이상향에 관한 생각들을 논리에 맞게 짜 놓은 것’이 실제 뜻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A라는 대상이 ‘이상적’으로 어떠할지(혹은 어떠해야 할지)를 설명함에 있어,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 자체는 어떠한 긍정의, 부정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학문적으로 이 단어가 처음 등장했던 D. 드 트라시의 《이데올로기 개론》을 보더라도 정의(definition) 자체는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서 품고 있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이념’으로 설명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해 약간의 오명을 쓰고 있던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발달한 사회심리학에 의해서 ‘한 개인의 퍼스널리티’를 설명하기 위한 요인 쪽으로 다시금 조명되었다. 즉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혹은 심리적 형성 과정이나 병리 현상을 해석할 때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나름의 이데올로기(비록 하나의 이름을 갖지는 못하였을지라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 개인의 이데올로기는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에서, 말투에서, 행동에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 사람이 사용하는 ‘상품’이다.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과 BMW 바이크를 타는 사람, 미니를 타는 사람과 페라리를 타는 사람, 닥터마틴을 신는 사람과 탐스슈즈를 신는 사람, IBM노트북을 사용하는 사람과 애플 노트북을 사용하는 사람. 이들은 분명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 상품이 가진 이미지를 택한 이유, 즉 그 사람의 이데올로기를 엿볼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그 상품 역시 자신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가졌기 때문에, 자신을 규명하기에 합당한 상품이기 때문 에, 안정된 자아 정체성을 갖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그 둘(브랜드와 소비자)은 같은 ‘이상향’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것을 해석하고 삶에 녹여 내는 데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 둘은 같은 ‘당(黨)’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각 카메라의 마니아들은 자신을 대변하는 브랜드 신봉자들이 되어 점차 ‘영향력 있는 비주류(minor)’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만의 혁명을 꿈꾼다. 혁명은 언제나 ‘다름’에서 시작된다.
당신은 어떤 사진이 어떤 카메라 브랜드로 찍은 것인지 '구별'할 수 있겠는가?
만약 구분할 수 있다면 사진 속에 묻어난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