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착한 브랜드에 담긴 욕망의 코드 볼륨배지시즌배지

Written by 배근정  고유주소 시즌1 / Vol.12 슈퍼내추럴 코드 (2009년 11월 발행)

“참, 착한 책이네요.” 얼마 전, <오스티엄Key>에 실릴 사진을 도네이션(donation) 받기 위해 한 사진 작가를 만났다. <오스티엄Key>를 한 참 펼쳐 보던 그 작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다름 아닌 이 말이었던 것이다. ‘어떤 질문은 인생의 답을 가지고 있다’라는 컨셉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고민해 봐야 할 주제에 대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구성된 이 책에 대해 그는 왜, ‘착하다’라는 표현을 쓴 것일까? 그의 생각을 콕, 집어 알 수는 없겠지만 두 가지 정도로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편집자가 말하기 쑥스러운 멘트지만) <오스티엄Key>가 삶을 살찌우는 내용이라는 뜻일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책이 쓰이는 용도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이 책의 수익금은 NGO 단체를 통해 세계 어느 곳이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사용된다). 그런데 이 말보다 그의 다음 말이 더욱 놀라웠다. “<오스티엄Key>가 하는 일이라면 이제 뭐든지 돕겠습니다.” 불과 5분 전, <오스티엄Key>를 난생처음으로 펼쳐 본 그가 <오스티엄Key>에 대해 이토록 맹목에 가까운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5,000원을 가뿐히 넘는 스타벅스 커피는 소위 ‘된장녀’의 필수품으로, 스타벅스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로서의 가치와는 별개로 ‘나쁜소비’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런데 십 년 후쯤이면 이 된장녀가 적어도 스타벅스커피 코리아 (그런 것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서에는 ‘해프닝’으로 기록될는지 모르겠다. 2009년 9월 15일,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는 전국 300여 개 매장에 ‘셰어드 플래닛 인증 원두’를 사용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셰어드 플래닛은 원두의 품질, 거래의 투명성, 사회적 책임, 환경 보호 등 4개 기준의 200여 개 절차를 모두 충족한 원두에 부여되는 것으로, 원두를 사는 사람은 양질의 원두를 얻을 수 있고, 원두를 파는 사람은 그 대가를 공정하게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두가 사고 팔리는 과정에서 생긴 일정 금액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복지 기금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결국, 9월 15일 이후부터 스타벅스 커피를 구매하는 모든 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사회에 ‘공헌’한 셈이 된다. 스타벅스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스타벅스가 언론사를 통해 발표한 설명문에 그 이유가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스타벅스가 펼치는 사회 공헌 캠페인 중의 하나입니다.”

 

이 문구는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저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이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2005년 미국의 컨설팅 회사인 KPMG의 조사에 따르면 포춘 250대 기업 중 45%가 기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환경, 사회 등의 분야와 관련된 사업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것은 1999년 35%와 비교할 때 10%나 높아진 수치다. 이처럼 전 세계가 유행처럼 이른바 ‘착한브랜드’가 되는 방법에 대해 골몰하고 있다. 대형 마켓에 들어가 그곳에 진열된 다양한 상품 중 무작위로 몇 개만 골라도 그 중 한 개는 분명, “이 제품의 수익금 중 1%는 도움이 필요한 것에 기부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을 거라는 확신까지 들 정도로 말이다.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착한브랜드’란 CSR을 통해 기업의 수익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이 만든 브랜드나 또는 브랜드의 수익금 중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브랜드를 일컫는 말이다. 지난 9월 16일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흥미로운 설문 조사를 공개했다.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기업 사회 공헌활동에 대한 인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78.0%가 “사회 공헌 활동이 우수한 기업의 제품을 ‘비싸더라도’ 살 의사가 있다”고 답한 것이다. 이것은 착한 브랜드에 대한 ‘믿음’을 확증하는 보증수표를 발행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 왜, 소비자들은 ‘착한 브랜드’에 이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 정답(?)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왜 소비를 하는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소비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재화를 소모하는 일.’

 

국립국어원이 정의한 ‘소비(consumption)’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이 정의에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정답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 다름 아닌, 사람들이 ‘왜’ 소비를 하는지에 대한 명명백백(明明白白) 한 이유다. 그 이유는 소비의 정의에 보란 듯이 드러나 있는 대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 자, 내친김에 좀 더 쫓아가 보자. 그렇다면 ‘욕망’이란 무엇일까?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 또는 ‘생물의 행동을 야기시키는 개체의 동인(動因).’

 

이 두 가지 정의를 재정리해 보면 소비란, ‘부족을 느껴 (생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동인이 되어 그 부족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재화를 소모하는 일’이 될 테다. 여기에 정답에 대한 또 하나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 바로 ‘부족不足을 느껴’가 그것이다. 위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실체’는 다름 아닌 ‘부족’이다. 뒤집어 말하면, 부족을 느끼지 않는다면 욕망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결국 소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지점이 아주 명확해진다. 바로 ‘부족’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실체’는 다름 아닌 ‘부족’이다.
뒤집어 말하면, 부족을 느끼지 않는다면 욕망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결국 소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다.

 

 

성경에 보면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늘에 있는 신에게 구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구절이 나온다. 그 중 한 대목은 이렇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차피 (아직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은) ‘소망’을 (그저) 말하는 것이라면 십 년의 양식을 구한다고 한들 하늘이 두 쪽 나는 이변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딱, 하루 동안 필요할 양만 구하라고 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종교적인 관점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지금 당신의 책상 위에 있는 것들만 살펴보아도 단박에 알 수 있다. 아이팟, 파버카스텔 펜, 몰스킨 노트…. 이것은 ‘필수품’이 아니라 ‘옵션’이다. 우리의 삶은 이처럼 수많은 ‘옵션’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필수품’을 가뿐히 넘어서 ‘옵션’까지도 충분히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왜 ‘부족’이 생겨나는 것일까?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라캉 버전(version)의 욕구, 요구 그리고 욕망의 정의부터 짚어보아야 한다. 라캉은 욕구(Need)란 식욕, 성욕, 물욕과 같이 인간이 가장 일차적으로 느끼는 충동으로, 이것의 최종 목적지는 ‘만족감’이라고 얘기한다. 만족을 갈망하는 욕구는 자연스레 그 다음 액션을 취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을 만족시켜 달라는 ‘요구(Demand)’ 말이다. 그래서 라캉은 “요구란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욕구는 내재된 것이라면 요구는 그것이 언어로 표출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생각해보라. 당신의 모든 요구는 전부 받아들여지는가? 아예 표현조차 될 수 없는 욕구가 훨씬 더 많다. 요구가 표현할 수 있는 욕구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범위 한에서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5성급 호텔의 뷔페가 먹고 싶다고 하자. 그런데 당신의 주머니에는 천 원이 전부다. 그렇다면 요구를 표출할 수 없지 않은가.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욕구의 수에 비해 요구의 수는 반비례하게 되고, 욕구는 언제나 불만족 상태에 놓이게 된다. 라캉은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춘다. 욕구와 요구 사이에 생기는 간극을 그는 ‘욕망’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욕망은 ‘결핍’, 그러니까 ‘부족’에서 태어난 것이다. 자, 우리가 ‘부족’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욕망의 태생 자체가 바로, 부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은 결핍이다. 그 결핍을 메울 대상을 찾아 나서지만 결코 만족될 수 없기에 또 다른 대상으로 끊임없이 치환될 뿐 영원히 ‘결핍’의 상태일 수밖에 없다.

 

라캉은 좀 더 밀착하여 이 욕망의 속성을 관찰한다. 그러면서 그는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도둑 맞은 편지》를 펼쳐 든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은 왕과 왕비 그리고 장관이다. 어느 날 왕비는 왕이 절대로 봐서는 안 될 편지를 책상에 펼쳐 두었다가 왕과 장관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는다.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왕비는 편지가 중요하지 않은 문서처럼 보이도록 천연덕스럽게 그대로 펼쳐 둔다. 결국 왕의 시선은 편지에 닿지 않는다. 그런데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책상 위에 펼쳐진 문서가 중요한 것임을 직감적으로 안 장관은 그 편지를 왕비가 보는 앞에서 유유히 훔친 것이 아닌가. 왕이 옆에 있기에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던 왕비는 그 후 경찰에게 그 편지를 찾도록 종용하고 편지를 찾지 못한 경찰은 탐정 뒤팽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의 욕망은 눈치챘겠지만 ‘편지’를 소유하는 것이다. 이들은 ‘왜’ 편지를 탐하는 걸까. 에둘러 가지 않고 아주 쉽게 생각해 보면 왕비는 왕에게 편지의 존재가 발각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 테며, 장관은 왕비의 편지를 자신이 가짐으로써 왕비의 약점을 이용해 권력을 갖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 뒤에는 이것을 움직이는 훨씬 더 강력한 자극제가 하나 더 숨어 있다. 바로 ‘(무언가로부터의) 인정’이다. 왕비가 왕에게 편지를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은 뒤집어 보면 ‘편지가 부재’함을 왕으로부터 ‘인정’받아 왕비로서 그동안 누려왔던 사회적 지위를 그대로 ‘인정’받고자 하기 위함이며, 또 장관이 일부러 여왕의 눈에 띄게 편지를 훔친 것 역시, 왕비에게 중요한 편지가 자신의 손 안에 있음을 ‘인정’받고, 더 나아가 자신이 왕비의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권력이 있음을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비와 장관이 편지를 욕망하는 이유는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것 때문이다. 결국 ‘편지’는 타자의 담론을 전달하는 매개체인 것. 타자는 때로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사회적 용인일 수도 있으며, 또 때로는 사회적 질서일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어떤 대상을 욕망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대상의 내적 성질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결국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따라서 왕비와 장관이 편지를 욕망하는 이유는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것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장관이 편지를 훔칠 때 왕비가 그것을 제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첫째, 왕이 편지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며, 둘째, 이것은 그런 편지가 왕비에게 없을 것이라는 왕의 욕망(혹은 왕비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결국, 왕비는 왕비로서 그동안 자신이 누려 왔던 것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왕비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장관이 편지를 가져가는데도 말하지 못하는 왕비로서 자신의 모습을 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라캉은 욕망 외에 타자가 각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것을 한 가지 더 포착한다. 바로 ‘위치’다. 타자의 담론을 배달하는 편지에 의해 왕과 왕비, 장관 등은 각각 자리가 지정된다. 편지를 보지 못하는 왕, 장관에게 편지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왕비, 그리고 보란 듯이 편지를 훔치는 장관. 이 지정 받은 자리를 이탈할 경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채울 수 없게 된다. 결국 각 사람들은 이 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받아들이며 편지, 즉 타자의 담론과 자신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라캉은 이것을 ‘동일시 과정’이라고 얘기한다. 각각의 인물들은 타자에 의해 지정된 자리가 자신에게 가장 ‘이상적인 자리’라고 받아들이며, 결국 그 이상적인 자리를 인물들은 ‘자아의 이상(ego-ideal)’으로 생각하여 거기에 자신을 동일시해 간다는 것이다. 다시 왕비를 예로 들어 보면, 장관이 훔쳐가는 데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타자로부터 지정 받은 자신의 자리에 자아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라캉은 욕망이 어떻게 생기는지, 그리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분석해 봄으로써 욕망의 실체인 ‘타자’를 밝혀 냈다. 각각의 자아들은 끊임없이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조명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찾아간다. 즉 자아는 ‘보여짐의 시선’을 항상 인식하며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검열 54한다. 이 시선은 광장처럼 개방된 공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가족, 심지어 자신이 홀로 있을 때도 작동한다. 결국 《도둑 맞은 편지》를 통해 라캉이 궁극적으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은 진정,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이제 다시 되돌아가 보자. ‘착한 브랜드’를 욕망하게 하는 ‘타자’는 그럼, 무엇일까? 서론이 길었다. 자, 본론은 지금부터다.

 

 

착한브랜드의 ‘나눔의 담론’

결혼을 앞두고 냉장고를 사러 전자상가에 방문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 두 가지 제품을 두고 당신의 선택만이 남은 상황이다. 두 제품 모두 같은 제조사에서 출시된 브랜드다. 그런데 하나는 양문형 냉장고이며 다른 하나는 일반형이다. 당신의 신혼집은 15평의 원룸형 아파트이며 향후 2~3년간은 자녀 계획이 없다. 주거 환경과 생활에 맞추어 본다면 일반형 냉장고가 당신에게는 ‘적합 상품’이다. 그러나 당신의 신용카드는 양문형 냉장고의 가격을 지불한다. 왜일까? 그것은 양문형 냉장고에 들어 있는 ‘타자의 담론’ 때문이다. 그 담론은 바로 ‘신분의 상승’이다. 고급형 냉장고는 높은 사회적 지위와 등호(=) 관계라는 자본주의 사회(즉, 타자)가 주는 욕망에 따라 그것을 구매함으로써 나의 사회적인 지위가 높음을 (실제로 사회적 지위가 높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일반형 냉장고이지만, 타자의 담론을 담고 있는 양문형 냉장고가 주는 욕망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결국 타자가 당신의 위치라고 지정해 준 곳에 당신의 자아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의 사회》의 저자 보드리야르는 이처럼 타자의 담론이 들어간 상품은 더 이상 본래의 목적인 ‘사용가치’를 잃어버리고, 그 대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관념적인 의미, 즉 기호가치를 얻게 된다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냉장고는 이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냉장’이라는 객관적인 가치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상류층 가정’이라는 기호적 가치로 소비된다는 것이다. 결국 타자들이 만들어 내는 담론은 ‘차이’다. ‘너와 나는 다르다’라는 차이를 소비하게 하는 것이다. 가구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는 오크재와 티크재를 보자. 이 두 가지 재료가 차이 나는 이유가 혹 원산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 이유는 오크재가 가진 고상한 분위기 때문이다. 오크재가 그러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본래 고상함을 간직한 물질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고상함의 ‘문화적 기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이제, 유추해 내야 한다.

 

 

결국 타자들이 만들어 내는 담론은 ‘차이’다.
‘너와 나는 다르다’라는 차이를 소비하게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궁금해지지 않는가? 이 소비의 욕망을 불어넣어 주는 타자의 담론을 만들어 내는 궁극적인 ‘주체’가 대체 누구일까, 말이다. 그것은 ‘부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 혹은 기업 그리고 브랜드들이다. (물론 그것의 가장 큰 테두리에는 자본주의라는 거대 시스템이 있지만 말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타자들은 ‘미디어’를 통해 담론을 더 강화한다고 얘기한다. 24시간 동안 쉴 새 없이 가동되는 미디어가 지속적으로 전달하는 이 타자의 담론은 소비자들에게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를 더욱 ‘강화’시키고, 그 욕구는 다시 욕망을 만들어내 결국 소비자들은 기호가치를 소비함으로써 타자가 지정해 준 자신의 자리에 무사히 안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타자들은 과거와는 조금 다른 양상의 담론을 만들어 냈다. 바로 ‘나눔’이다. 그 선봉에는 세계적인 부호라 일컬어지는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가 있다.

 

과연, 그것이 얼마큼일까 상상조차 되지 않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세계 최고의 갑부인 워렌 버핏. 그는 그 상상조차 되지 않는 재산의 무려 85%를 기부하며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얼마 후, 워렛 버핏의 조언으로 빌 게이츠는 아내와 함께 빌앤드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설립해 재산의 60%를 기부했다. 두 사람에게 물었다. “왜 기부를 하십니까?” 이들의 대답은 이랬다.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이 대답의 숨은 뜻은 사실, 이렇다. “자아실현(Self-Actualisation)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알고 있다시피) 매슬로의 5단계 욕구론 중 가장 높은 단계에 해당하는 욕구가 바로 이 자아실현의 욕구다. 이것은 다른 말로, 이 욕구가 요구로 실현되기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레 ‘욕망’이 생기게 된다. 결국 ‘기부’는 자아실현의 결핍이 만들어 낸 것으로 이것은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라는 담론의 생산자들에 의해 ‘나눔’의 담론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결국 ‘착한 브랜드’는 바로 이 나눔의 담론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사람들에게 ‘나눔’이라는 욕망을 심어주는 전달자인 것이다.

 

그런데 혹,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는가?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기호가치의 다른 말은 ‘신분’이라고 했다. 즉,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기호가 상품에 새겨진 것이다. 그런데 착한 브랜드를 소비하면 당신의 신분이 과연, 높아질까? 예를 들어, “이 수익금의 1%는 아프리카의 우물 파는 데에 사용됩니다”라고 새겨진 한 브랜드의 옷을 구입하여 입는다면, 그 옷은 당신의 신분을 높이는 데 얼마나 작용할까? 그렇다면 착한브랜드는 ‘기호가치’가 아니지 않는가? 그럼, 착한브랜드는 사용가치로만 사용되는 것일까? 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보드리야르의 또 다른 저서 《불가능한 교환》에서 들어볼 수 있다.

 

“ ‘상징적 교환’에서 물건은 곧 객체가 아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물의 경우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만) 굳어지는(다른 말로 나타나는) 양도계약과 물건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선물은 사용가치도 경제적 교환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상징적 가치만을 갖는다. … 선물은 유일성을 지니며 교환의 유일한 순간에 의해 명확하게 한정된다.”

 

만약, 누군가로부터 당신이 선물을 받았다고 하자. 그 선물이 다이아몬드 반지든, 혹은 장미꽃 한 송이든 그것은 상관없다. 이 선물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본래 목적인 사용가치도 아니며, 또 신분을 보여 주는 기호가치도 아니다. 이 선물에는 단지, 선물을 주고 받은 두 사람간의 사랑, 혹은 우정, 존경 등의 ‘상징적 의미’만 있을 뿐이다. 결혼기념일에 남편은 아내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했고 아내는 손수건을 선물했다 할지라도 이것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보드리야르가 말한 ‘상징적 교환’이다. 사물이 가진 사용 목적을 소비하는 것도,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기호가치의 소비도 아닌 오직, 두 사람과의 ‘관계적 의미’를 상징하는 교환인 것이다.

 

착한브랜드를 소비한다는 것은 바로 소비자가 브랜드와 ‘상징적 교환’을 하는 것이다. “이 수익금의 일부는 누군가에게 기부됩니다”라는 말에는 사실, 이 말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브랜드와 소비자의 공동 이름으로’. 소비자는 착한 브랜드를 소비함으로써 브랜드가 펼치는 모종(?)의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것은 더 이상 ‘소비 행위’가 아니라 브랜드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착한브랜드라면 비싸더라도 살 의향이 있다’고 의사 표시를 한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소비자는 브랜드가 실시하고 있는 선한 일에 동참함으로써 브랜드와 ‘상징적 교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착한브랜드를 소비한다는 것은 바로
소비자가 브랜드와 ‘상징적 교환’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브랜더라면 여기서 한 가지 더 추측해 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이 상징적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실체’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믿음’이다. 만약 남편이 자기가 선물한 다이아몬드 반지에 비해 아내가 선물한 손수건의 보잘것없다고 그 선물을 버린다면, 부부간의 신뢰가 없음을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상징적 교환은 ‘믿음’에서 비롯된다. 비록 그 시작은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상징적 교환’이 사용가치 혹은 기호 가치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는 이유는 그 출발의 시작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이유로 보드리야르는 상징적 교환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 소비’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스티엄Key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돕겠습니다”라는 그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며, ‘착한브랜드’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브랜드들이 해야 할 일이란 바로, 그들이 우리에게 보내 준 믿음의 보증수표가 공수표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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