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 선생과 책 한 권 만들어 내놓기
책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브랜드다 볼륨배지시즌배지

Written by 고세규  고유주소 시즌1 / Vol.6 브랜드 런칭 (2008년 08월 발행)

400여 권의 책이 내 손을 거쳐 갔지만, 케이 선생과 만든 이 한 권의 책, 10여 개월은 내게 새로운 시간이었다. 저마다의 책을 진정한 명품, 베스트 브랜드로 런칭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새로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케이 선생과 책 한 권 만들어 내놓기 도서출판 브랜드, 고집, 정체성, 신념, 편집증, 진정성, 차별화 전략
고즈윈(문학의숲) 대표 고세규

 

 

케이 선생(실명이 아니다. 실명을 쓰지 않는 건 이 글이 작가 고유의 이미지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칠까 조심스러워서다)은 유명한 시인이다. 한국 최고의 번역가고, 공식 비공식 모두 한국 출판사상 가장 많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는 작가다. 재작년 가을, 형을 따라 갔다가 그분을 뵐 일이 있었는데, 우리 회사에서 펴낸 《마크 트웨인 자서전》을 비롯해 서너 권의 책을 선물했다. 케이 선생은 형의 대학 동문 선배였는데, 모교 교수의 잘 팔리지 않을 법한 딱딱한 문학평론집 만드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 동석한 것이었다.

 

대문에 들어서니 케이 선생은 마당의 다년생 화초들을 한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집이 너무 낡아서 전면 보수를 해야 하는데, 공사를 위한 작업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10월 경이었는데, 마당 탁자에 앉아 툭툭지는 낙엽을 보며 꽤 오랜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난 지 한 달쯤 뒤에 케이 선생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다시 찾은 선생의 집은 막 공사를 시작했는데, 보수 정도로는 안 되고 일부분은 너무 낡아 붕괴 위험까지 있어서 아예 다시 지어야 한다고 했다. 마당에는 몇몇 건축자재가 쌓여 있었고, 집은 언제든 헐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선생은 번역된 원고뭉치 하나를 주면서 관심이 가는 내용인지 검토해 보라 했다. 출판을 하는 내게 가장 반가운 선물 중 하나는 원고일 수밖에 없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무실에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케이 선생과 책 한 권 만들어 내놓기가 시작되었다.

 

 

사막에는 교통체증이 없다

흥미로운 원고였다. 프랑스 책이었는데,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면 ‘사막에는 교통체증이 없다’였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푸른 옷의 투아레그족 청년이 프랑스라는 낯선 문명세계를 접하며 느낀 점과 여기서 생긴 각종 에피소드를 책으로 옮긴 것이었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신비로운 푸른색 베일을 쓰고 사하라 사막에서 대대로 살아가는 유목민 투아레그족 야영지, 어느 날 그곳에 파리-다카르 자동차 경주대회를 취재하러 온 프랑스 여기자가 나타난다. 그녀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우연히 책 한 권이 떨어지고, 이를 본 유목민 소년이 달려가 책을 집어 준다. 소년을 귀엽게 여긴 여기자는 그 책을 소년에게 선물로 주고 떠난다. 글과 그림이 실린 그 책을 반드시 읽겠다고 결심한 소년은 아버지를 졸라 날마다 30킬로미터를 걸어 학교에 다닌다. 마침내 소년이 읽게 된 그 책은 바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결말 부분에서 어린 왕자가 죽는다는 내용을 읽은 소년은 자신과 같은 어린 왕자의 형제들이 아직도 사하라사막에 살고 있음을 말해 주기 위해, 생텍쥐페리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프랑스로 가서 그를 만나겠다고 마음먹는다.

 

사막에서 근처 작은 도시로, 그곳에서 좀 더 먼 도시로, 그리고 다시 더 먼 도시로, 그리하여 마침내 스무 살 무렵 극적으로 프랑스에 도착한 이 투아레그족 청년 앞에 마술과도 같은 문명 세계가 펼쳐진다. 소설보다 더 놀라운 이 실화의 주인공 청년 무사 아그 앗사리드는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 기적으로 가득 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즉 행복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책은 어린 왕자의 별을 지키던 사막의 유목민 소년이 문명세계에 사는 우리들에게 전하는 삶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문명 비판서였다.

 

선생은 집을 지어 가는 동안 이 책을 ‘함께’ 만들어 보자고 했다. ‘함께요? 집 짓는 동안? 이미 번역도 다 되었으니 디자이너가 조판 프로그램에 집어넣어 글을 앉히고 교정만 보면 본문은 금세 만들어질 거고, 표지도 원서가 있으니 그 이미지 가져다 제목만 바꿔 주면 될 텐데, 굳이 여러 사람 머리 쓸 필요 있을까요? 그나마 집 짓느라 힘도 많이 드실 텐데. 집 다 지으려면 여러 달 걸릴 텐데, 겨우 책 한 권에 그렇게 여러 사람이 매달려서 오랜 시간을 허비하면 어디 경제성이 있을까요? 물론 원고를 소개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도 만들어온 책이 벌써 400여 종인데, 원고도 꽤 재미있는 듯하고 컨셉도 명확하니 제가 깔끔히 처리하죠.’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소개해 주신 분의 성의와 쉽사리 거절하기 힘든 선생의 카리스마와 베스트셀러 작가의 재미있는 이야기도 종종 듣고 안목도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 번 같이 책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책은 혼자 만들어도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만들어보기로 했다. 선생은 이와 같은 사라져가는 문명에서 배우는 지혜를 다룬 책을 여러 권 소개해 온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영혼을 울리는 문장을 만들 줄 아는, 이 책을 위한 최고의 조언자였다. 나는 가장 뛰어난 파트너와 책을 만들 수 있었다.

 

 

선생은 이와 같은 사라져가는 문명에서 배우는
지혜를 다룬 책을 여러 권 소개해 온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영혼을 울리는 문장을 만들 줄 아는, 이 책을 위한 최고의 조언자였다.

 

 

사하라사막에 가자

선생과 나는 기본적으로 투아레그족을 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혹시라도 한국을 방문 중일지 모를 투아레그족을 직접 만나는 일이었는데, 온갖 방법으로 검색하고 알아봐도 한국에 투아레그족은 없는 듯했다. 그러자 선생이 제안을 했다. 사하라사막에 가자고. ‘헉, 그럴 것까지요. 오가는 동안 비행기만도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데다 거기는 국경 분쟁 중이라 생명 보장도 안 되는데요. 거기다 지금 막 허물어 놓은 이 집을 내박쳐 두고 책 한 권 때문에 그 길을 나서요? 게다가 이 책은 선생님 이름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말도 잘 안 통할 텐데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회사 일정상 좀 어려우니 대신 다른 정보를 풍부하게 구해서 보완해 보자고 했다.

 

올라와 있는 모든 국내외 인터넷 자료를 모으고, 현지에 다녀온 사진작가와 KBS 다큐멘터리 감독을 인터뷰했다. 사진집과 다큐를 구해 케이 선생과 함께 보는 시간도 가졌다. 어느 날 케이 선생이 좋은 자료를 구했다는 연락이 와서 함께 보게 되었는데,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만든 한 투아레그 소년의 감동적인 생애 첫 카라반(caravan, 隊商) 경험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한국 방송사에서 만든 다큐는 1주일 동안 사막에 머물면서 그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단박에 결론을 내린 반면,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만든 다큐는 6개월 가량을 그들과 직접 생활하고 카라반을 동행하며 소년이 배우고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들의 눈으로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연말, 매서운 추위 속에서 선생 집은 본격적으로 건물의 토대와 기둥이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영상을 재생하는 내 노트북에는 연신 나뭇재가 내려앉았는데, 마당에 드럼통을 가져다 놓고 불을 피워 추위를 피하며 비디오를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드럼통에 계속 장작을 넣어 가면서 사람들이 왜 이 책을 좋아할지, 이 책의 장점과 메시지가 무엇인지, 감동적인 대목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어떤 책이라 소개할 것인지, 책 안에 이미지를 넣을 것인지 그냥 텍스트만으로 갈 것인지, 넣는다면 어떤 이미지를 넣을 것인지, 작업 인부들이 다 떠나간 자리에 남아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람 프랑스인 아닐까

원서를 보면 프랑스 사람들은 책을 참 쉽게 만든 듯했다. 표지에는 투아레그족 청년의 얼굴이 부담스러울 만큼 큼지막하게 들어가 있고, 분문엔 그저 텍스트만 죽 나열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프랑스에서는 꽤 잘 팔리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이 사람이 방송에도 자주 나오고 꽤 명사가 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 중에 투아레그족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는 무언가 이 책에 어울릴 만한 이미지를 찾아 넣기로 했다. 우리는 정말 낯선 이 사막의 여행자를 조금이나마 구체적으로 전해 주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어떤 이미지를 넣을 까를 두고 사진과 그림 사이에서 갈등을 거듭했다. 일단 사진과 그림 등 가능한 모든 것을 구해 보기로 했다. ‘모조리 다요? 하나만 결정해서 그것만 집중적으로 구하면 힘이 덜 들 텐데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직접 보지 않고 상상만으로 판단하는 건 어쨌거나 불완전한 일. 전 세계 웹사이트를 다니며 투아레그족 사진과 그림, 음악 등을 모두 모았다. 그러나 사막 사진은 아주 많은데 비해 투아레그족 사진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는 투아레그족 사진도 사막의 영혼이 느껴지는 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 중 가장 작품성이 뛰어난 사진들을 따로 모아 글과 함께 디자인해 보았다. 세 명의 작가가 그린 그림도 있었는데, 이 그림도 글과 함께 디자인해서 비교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 중에 투아레그족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일주일 정도 숙고한 끝에 그림을 넣기로 했다. 이 소년의 이야기가 한 폭의 서정적인 풍경화처럼 다가오는데다 《어린 왕자》 이야기가 오버랩되면서 서사성이 강하게 풍긴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사라져 가는 한 힘없는 문명에 대한 슬픔이 진하게 배어 있다는 점을 표현하는데도 직설적이고 차가운 사진보다 그림이 더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마침내 정말 좋은 그림을 발견했다. Gack Jean Pierre라는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아득한 슬픔과 깊은 서정성이 살아 있었다. 직접 투아레그족 야영지에 다녀오고 나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한 8편의 작품을 글로벌 포스터 판매 사이트에서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해당 사이트에 작가의 이메일 주소를 의뢰했다. 다른 작가들의 메일 주소는 대개 사이트에 남아 있었는데 이 작가의 것만은 남겨져 있지 않았다. 시간과 노력을 더 들였지만 해당 사이트를 통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기적처럼 만난 이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아쉬움 섞인 대화를 나누던 중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데 이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 하는 말이 흘러 나왔다. 우리는 작가의 이름에 주목했다. 좀 프랑스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야후 프랑스를 검색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작가의 홈페이지를 발견했다! 홈페이지에는 우리가 찾던 더 많은 환상적인 작품이 올라와 있었다. 우리는 그 모든 그림들을 저렴하게 구입해서 책에 담을 수 있게 됐다. 프랑스 출판사에서는 가까이 있는 이런 좋은 작가의 작품을 왜 쓰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미리 책에 담아 두었으면 우리의 수고를 덜어 주었으련만.

 

선생의 집 공사는 진척이 더뎠다. 그 집은 춘원 이광수가 잠시 살던 집이기도 했는데, 1930년대 일본인 기업가가 지은 일본식 가옥이었다. 선생은 모조리 부숴버린 뒤 아예 다시 짓는 방법을 쓰지 않고 최초 건물에서 살릴 수 있는 구조물은 새 집에 다시 살려 넣는 법을 택했다. 건축업자들은 모두 밀어버리고 다시 지어야 더 빠르고 쉽고 저렴하게 지을 수 있다고 했지만.

 

 

 

 

 

투아레그인과의 인터뷰

원고 준비됐고, 그림 준비됐고 대개 이 정도면 책은 일사천리로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도 원고 품질이 일정 수준 보장되는 번역서니까. 이 책의 원고는 2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각 부는 짤막짤막한 40여 꼭지(작은 글)의 글로 이루어져 있었다. 짤막짤막하게 프랑스인의 삶과 유목민의 삶을 비교해 주는 식이었다.

 

선생은 이런 책은 더 진지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툭툭 끊기는 80꼭지도 10꼭지 정도로 이어 붙여서 각 장이 좀 더 긴 호흡으로 읽힐 수 있게 하자고 했다. 무게감 있게 독자에게 다가가야 두 문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가능하고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전할 수 있다는 판단했던 것이다. 80여 편의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11꼭지로 한데 묶었다. 서문 부근에는 더 진한 감동이 배어 있는 이야기를 배치했다. 첫 시작이 재미있어야 독자와 관객의 눈을 붙들어 둘 수 있다는 3분의 법칙을 적용해서다. 각 꼭지의 끝부분에는 여운이 있는 글들을 배치했다.

 

그러고도 선생은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무언가가 좀 부족했던 것이다. 일단 분량부터 적다고 했다. 이 정도 주제를 다루려면 책 자체의 크기와 분량도 더 필요하다고 했다. 선생은 파리에 있는 이 투아레그족을 인터뷰해서 내용을 보강하자고 했다. ‘케이 선생님, 그런데 요즘 독자들은 책이 두꺼우면 잘 사지 않거든요. 짤막짤막하게 잘라놓아야 한 편씩 쉽게 읽고 넘어갈 텐데 얘기들을 줄줄이 이어 놔서 그렇잖아도 책을 보면 좀 어렵게 느낄 텐데요. 성사될지 안 될지도 모를 저자 인터뷰를 시작해서 돈 들이고 시간 버리고 할 필요가 있을까요.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만들었는데도 지금 잘 팔리고 있다던데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이 책은 원래 프랑스 독자들을 위해 만든 것. 우리는 우리나라 독자들을 위해 책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독자들이 관심 가질 이야기를 담아야 할 당연한 책무가 있는 것 아닐까.

 

 

 이 책은 원래 프랑스 독자들을 위해 만든 것.
우리는 우리나라 독자들을 위해 책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독자들이 관심 가질 이야기를 담아야 할
당연한 책무가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현재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저자를 직접 인터뷰해서 책의 내용을 보강하기로 결정했다. 저자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를 질문지로 만들어 보니 무려 50여 항목이 나왔다. 일단 10개 정도의 질문을 먼저 이메일로 보냈다. 얼마 안 있어 꼼꼼하고 감동적인 답장이 돌아왔다. 저자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고, 놀라운 안목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고무된 우리는 2차 질문을 통해 또다시 10가지 정도의 답변을 더 들었고, 나중에는 프랑스 현지의 한국 유학생을 통해 아예 저자를 직접 만나 나머지 질문들을 집중 인터뷰해서 A4 49장에 이르는 탁월한 원고를 추가로 마련했다.

 

어느새 2월, 새해가 되고 음력 설날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케이 선생 댁의 공사는 끝날 기미가 안보였다. 다행히 외벽은 다 마무리되었고 내부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선생은 어느 한 부분도 그냥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구석구석 공력을 들여야 모든 것이 제 모습을 갖춘다는 선생의 소신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 장작불을 켠 드럼통 주위를 전전하던 우리의 편집 작업도 실내로 들어올 수 있게 됐다. 공사 중인 집 한 구석에 전기를 끌어와 컴퓨터를 켜고 거기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본문 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한 페이지 여섯 글자 넣는데, 반나절

가장 먼저 자리 잡아야 할 판형만 해도 수없이 바뀌기를 반복했다. 처음에 정한 판형은 실제로 나왔을 때보다 많이 작았는데, 거기서 시작해서 가로 1밀리 세로 1밀리를 수도 없이 바꾸어 가며 실제로 직접 만들어 눈으로 확인하고 느낌을 토론하며 제 모양을 찾아 갔다. 본문 사이즈와 위치도 하루 저녁만 해도 수차례씩 바뀌기를 반복했다. 본문을 상단에 불편하리만치 올려 붙이는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 척박한 사막의 불편함을 전달해 보자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은 아예 서점에 나가 하루 종일 다른 책들만 들여다보며 아이디어를 찾고 관련 디자인 자료와 서적을 탐색하기도 했다.

 

책을 열면 대개 제목만 들어가는 본문 첫 페이지가 있다. 이 페이지를 위해 제목 여섯 글자를 넣는데, 30번 정도는 폰트를 바꾸고 재배치하고 이것을 제각각 출력해 직접 잘라 보고 모양을 비교해 가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찾아 갔다. 반나절의 시간이 흘렀다! 2페이지 번역 계약 관련 영문 판권이 들어가는 페이지도 마찬가지. 역시 1시간 정도 공력을 들였다. 3페이지 제목, 저자 이름, 출판사 이름 들어가는 곳. 역시나 1시간쯤 걸렸다. ‘선생님, 이 부분을 눈여겨보는 독자는 거의 없는데, 너무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 하는 거 아닐까요. 게다가 모두 프린트해서 책 모양대로 잘라 보고 비교해 보려면 물자 낭비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그냥 감으로 해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이 부분은 책의 얼굴 아닌가. 읽든 안 읽든 책의 중요한 상징이고 인상을 결정하는 부분이기에 선생의 뜻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결국 이 페이지들은 나중에 모두 바뀌어서 실제로 완성된 책에는 전혀 반영이 되어 있지 않다. 나중에 아예 새로운 컨셉으로 책의 도입 부분을 만들었는데, 문을 열고 어느 특별한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 ‘그런데 이런 속도로 책 한 권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한 페이지에 들어갈 행수, 글자 크기, 페이지 안쪽 여백 등도 수차례 바꾸어 가면서 이 원고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본연의 모양이 무엇인지 찾아나갔다. 그냥 해 보는 건 없었다. 모든 시도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었다.

 

 

책 한 권을 큰 목소리로 낭독하며 교열하다

이 책에 대한 현지에서의 각종 서평 자료도 모으기 시작했다. 원작사에 요청하고 웹 서핑을 통해 찾아보니 이 독특한 인물에 대한 많은 보도와 인터뷰가 있었다. 도서 평론가와 주요 서점에서의 평가, 수상 경력 등도 수집할 수 있었다.
역자에게도 그 자료를 모두 보내 후기를 써 달라고 요청했고, 3차례 정도 수정을 해 가면서 내용을 보강했다. 역자의 개인적인 감상을 표현하는 글이 아닌 이 책의 배경과 가치, 저자에 대한 소개, 감동적인 글귀, 원작이 나온 현지 독자의 반응, 이 책의 종합적인 의미 등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풍부하게 담았다. 편집부는 역자가 글을 쓰는 데 한계를 느낄 때마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역자의 개인적인 감상을 표현하는 글이 아닌
이 책의 배경과 가치, 저자에 대한 소개, 감동적인 글귀, 원작이 나온 현지 독자의 반응,
이 책의 종합적인 의미 등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풍부하게 담았다.

 

 

그러면서 본문 디자인을 보강하고 이 책을 표현할 카피 등을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두 달이 흘러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선생의 집 공사도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선생의 집안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새로 지은 집 구조에 맞는 문고리, 벽 장식, 책상, 의자를 직접 만들고 수집하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들러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책에 들어갈 문안과 디자인을 다듬어 갔다.

 

그러나 마음에 쏙 드는 제목을 찾지 못해 표지 디자인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제목을 찾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다. 책 안의 문장을 이십여 번 정도 다시 훑었고, 수많은 조언자들을 붙여 제목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했다. 좋은 글귀가 있는 수많은 책들을 뒤지며 이 책에 어울릴 제목을 떠올렸다. 그렇게 후보에 올린 제목만 해도 300여 개.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답이 잘 안 나오자 선생과 나는 다시 한 번 더 본문이라도 점검해 두자고 했다. 선생은 다시 1페이지를 열더니 이 책을 낭독하며 수정해 가기 시작했다. 사막에 사는 한 유목부족의 지도자가 부족민들을 향해 연설을 하는 듯한 웅혼한 목소리로 책 안의 글자 하나하나를 읽으며 조금이나마 낭독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으면 수정해 갔다. 그러기를 너덧 시간 거의 앞부분 100여 페이지를 그 톤 그대로 낭독하며 독서에 방해가 되는 부분은 모두 술술 읽혀지도록 고쳤다. 그러기를 모두 세 차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문장은 어울리는 톤으로 매만져 나가며 책은 완성되어 갔다.

 

 

그 어떤 것이든 필요하면 언제든 고쳐야 한다

서문의 제목과 11개의 장 제목, 옮긴이의 글 제목도 적합한 후보들을 저마다 20여 개 이상씩 뽑은 뒤 책의 컨셉에 가장 어울리는 것을 찾아 배치했다. 영혼에 울림을 주는 제목, 책의 메시지에 어울리는 제목, 새로운 느낌을 전해주는 제목,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 등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한 그런 문장이 장제목에 배치되지 않도록 유의했다.

 

추천 서평도 준비하기로 했다. 이해인 수녀님, 법정 스님, 한비야 작가 등이 물망에 올랐다. 고심한 끝에 법정스님께 글을 부탁드리기로 했다. 가제본한 책을 한 권 만들어 보내기로 했는데, 비닐끈으로 묶여져 온 책을 본 케이 선생은 서랍에서 실을 꼬아 만든 예스런 느낌의 끈을 꺼내와 비록 가제본이긴 하지만, 책을 멋스럽게 꾸며냈다. 그런 정성 때문이었을까. 얼마 안 있어 법정 스님으로부터 낡은 원고지에 직접 펜으로 눌러 쓴, 노장의 기상이 느껴지는 칼칼한 서평 한 편이 도착했다.

 

제목이 정해졌다. ‘사막별 여행자’.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얻어낸 소중한 결론이었다. 날씨는 어느새 더워지기 시작했고 표지 디자인도 대략 방향이 잡혔다. 우리는 디자인한 책 표지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며칠 동안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만나 그 느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디자인을 수정했다. 그리고 그 표지를 출력해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고 며칠 동안 바라보고, 또다시 만나 그 느낌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수정을 했다. 이러기를 몇 차례, 표지 디자인은 우리가 꿈꾸던 모습과 일치되어 갔다.

 

 

 제목이 정해졌다. ‘사막별 여행자’.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얻어낸 소중한 결론이었다.

 

 

책에 들어가는 특정 출판사의 이름이나 로고는 대개 동일하다. 기껏해야 배경이 밝으면 진한 색, 배경이 진하면 밝은 색으로 바꾸는 정도. 이때 진한 색은 대개 검은색, 밝은 색은 흰색이다. 다른 요소들은 다 고민해도 로고는 별다른 고민 없이 기존의 모양대로 집어넣곤 한다. 표지 디자인이 잘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며 다음 작업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날 선생이 표지를 좀 바꾸어야겠다며 전화가 왔다.

 

출판사 로고 때문이었다. 그 동안 검은색으로 회사명을 디자인해 왔는데, 책 표지가 전체적으로 푸른색과 황색이 강하다 보니 검은색 회사 로고가 분위기를 어둡게 한다는 의견이었다. 우리는 붉은색을 쓰면 좋을 거라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해보았다 붉은색 네모 상자 안에 글자를 가두어 하단에 집어넣었다. 로고 색상 하나 바꾸니 분위기가 완전히 새로워졌다. 신비감이 더해지면서 책 안의 이미지들이 살아났다. 더 산뜻해졌고 생동감이 더해졌다.

 

표지와 본문의 용지는 각각 무엇을 쓸까, 어떤 방식으로 제본해야 이 책만의 독특한 내용을 반영하는 책 모양이 탄생할까. 우리는 공급 가능한 국내외 250여 종의 용지 샘플을 구해 공부했다. 샘플 인쇄를 해서 어떤 게 가장 잘 어울리는지 눈으로 확인하며 비교해 보았다. 제본법을 다루고 있는 몇몇 책들에서 그 동안 거의 시도되지 않던 새로운 모양의 제본법을 발견해 이 책에 적용했다.

 

장마가 막 끝나고 하늘 높던 여름날, 완성된 책이 세상에 나왔다. 책이 나오면 대개 일이 끝났다는 개운함을 먼저 느끼는데, 이 책은 서운함이 먼저 다가왔다. 이제는 책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도 더 이상 해줄 수 없다는 아쉬움 같은 것이었다. 선생 댁의 공사도 모두 끝났다. 틈틈이 손수 만든 책상과 책꽂이, 장식장이 새로 지은 목조 건축물과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고즈넉한 모양새에 어울리는 나무와 화초들도 마당에 저마다 자신의 자리를 잡았다. 작가의 집다웠다.

 

 

 

 

한 권의 책은 어떻게 브랜드가 되는가

책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브랜드다. 최근 출판사 자체의 브랜드 파워도 중요해지고 있지만, 역시나 독자는 출판사보다 책을 더 먼저 기억한다. 책을 언급할 때도 책 제목이 먼저 나오고 보조적으로 저자 출판사 출판 연도가 언급된다. 그만큼 책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독립된 존재다. 하나하나가 고유의 브랜드다. 따라서 모든 책들은 저마다 하나의 브랜드로서 온전히 제 모습을 갖추고 세상 앞에 내놓여져야 한다.

 

쉽게 만든다고 해서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어렵게 공을 들였다고 해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쉽게 만들어서는 베스트 북이 되지 못한다.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베스트 북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무조건 베스트 브랜드가 되는 건 아닌 이유다. 책으로 탄생할 저마다의 원고는 저마다의 베스트 모양새가 있다. 가장 저다운 모습으로 탄생할 수 있을 때 베스트 북, 베스트 브랜드가 될 수 있다.

 

선생은 쉽게 타협하지 않았지만, 승복할 줄 알았다. 우리는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합당한 근거가 있으면 결정된 사안도 언제든 뒤집고 두 말 않고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정보를 얻기 위해 가능한 네트워크를 동원했고, 함께 학습했다. 이 책을 만들면서 우리는 사막의 유목민이 되어 갔고, 누구보다 투아레그족 전문가가 되었다. 선생은 직접 번역하는 책의 경우 기를 쓰고 원저자를 만나러 가고, 저자가 글을 쓴 곳을 직접 방문해 그 느낌을 가지고 번역에 임해 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을 만들 때는 그 책을 담당하는 편집자, 디자이너들과 함께 직접 소로가 살던 월든 호숫가를 거닐었다고 한다.

 

선생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작가지만, 세상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작가였다. 마케터였다. 고객인 독자가 원하는 지점을 찾아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글자 하나의 종류, 크기, 자간, 행수, 종류를 수도 없이 테스트했다. 이 책을 선택할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분위기, 한마디를 찾아 몇 계절을 고민했다. 무엇보다 선생 스스로의 마음에 드는지 자신이 해오는 작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 걸 그 누구에게 권하겠는가. 그러면서도 선생은 무조건 시장 겉면에 드러나는 가벼운 유행을 좇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무작정 따르기보다 그 밑에 흐르는 시장의 깊은 욕망을 추적하는 듯했다. 그것들이 때로는 고객을 조금은 불편하게까지 만들어 더 큰 감동을 느끼게 하는 도전을 감행하게 했다.

 

흔하고도 흔한 것이 책인 시대다. 하루에만도 200여 권의 새 책이 서점에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선생은 남이 하지 않는 걸 하려고 했다. 아직까지 그 누구도 쓰지 않은 이미지, 용지, 제본법을 찾아가는 탐험을 했다. 그러면서도 잡다한 기술은 쓰려 하지 않았다. 서체는 가장 기본이 되는 명조와 고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멋을 살렸다. 화려하되 조잡하지 않게, 단순하되 궁색하지 않은 멋을 살려냈다.

 

 

 흔하고도 흔한 것이 책인 시대다.
하루에만도 200여 권의 새 책이 서점에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선생은 남이 하지 않는 걸 하려고 했다.

 

 

그는 가장 잘나가는 자리에 있고 뛰어난 상상력을 지녔지만, 지독하리만치 자신을 믿지 않았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책 모양 그대로 잘라보고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과거의 노력은 오직 그때를 위한 것, 오늘을 위해서는 오늘의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는 듯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객관적으로 멀리 두고 바라 보는 시간을 가졌다.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자신과 삶을 완성해 가는 장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인의 손을 통해 명품이 탄생하고 그 명품이 브랜드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직접 확인하는 경험이었다.

 

케이 선생과 만나 만든 《사막별 여행자》는 출판을 위한 일반적인 프로세스에서는 꼭 필요하지는 않을 몇 가지 고통스럽고 고집스런 작업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치면서 이 원고는 좀 더 온전히 자기다운 모습을 가지고 책으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베스트 북이 되었고 베스트셀러도 기록했다. 책을 한 권 펴낸다는 것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영혼을 담는 일이다. 케이 선생이 사라져가는 문명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세상을 향해 굽힘이 없는 투아레그족 전사의 목소리로, 한 문장 한 문장을 직접 낭독하며 글을 손질한 것은, 책에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담는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상품은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쓴 한 권의 책을 만든 이야기에는 책을 만드는 데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여러 노력들이 들어 있다. 그런 피곤한 절차들을 거치지 않아도 얼마든지 책을 만들 수 있고, 더 많이 팔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배우는 경험이었다. 400여 권 정도의 책이 내 손을 거쳐 갔지만, 케이선생과 만든 이 한 권의 책, 10여 개월은 내게 새로운 시간이었다. 저마다의 책을 진정한 명품, 베스트 브랜드로 런칭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새로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케이 선생은 그 동안 그런 노력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지금 한국 출판계와 문학계에서 가장 빛나는 하나의 브랜드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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