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칭의 정치학
‘안녕하신가? 박 차장!’ 볼륨배지시즌배지

Written by 권민  고유주소 시즌1 / Vol.6 브랜드 런칭 (2008년 08월 발행)

정당의 목적은 정권 획득이다. 그리고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이(특히 남자들이) 모여서 뭔가 궁리를 시작하면 그 과정과 결론은 항상 돈과 권력 그리고 섹스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버린다. 이번 신규런칭 프로젝트도 결국 섹스를 제외한, 돈과 권력이 뒤엉킨 이야기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 신규 브랜드를 만든다고 할 때에는 저마다 독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먼저 중소기업의 신규 브랜드 런칭은 일종의 생존을 위한 용기 있는 도전일 때가 많다. 성장하고 있는 중소기업에게 있어서 신규 브랜드는 희망이자 진보일 때가 많고, 정체되거나 퇴보하고 있는 중소기업에게 있어서 신규 브랜드는 마지막 시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어느 중소기업이나 신규 브랜드 런칭에 대한 마음은 절실하고 진실하다.

 

반면에 대기업에서 시도하는 신규 브랜드의 런칭 목표는 복합다면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새로운 시장을 알아 보기 위해서, 경쟁 기업에서 먼저 진행해서, 오너 경영자의 관심에 의해서, 신규 사업팀의 의무적 보고에 의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하고 싶어서(전문용어로는 ‘문어발’이라고 한다), 원래 매출 목표를 원대하게 잡아서, 주식 시장에서 성장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니까 혹은 인력의 구조조정을 위해서도 신규 브랜드를 런칭 한다. 사실 이 모든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나오기 때문에 신규 브랜드를 총괄하는 사람들은 최고 경영자의 목적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신규 브랜드를 런칭하라고 지시한 오너마저도 원래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때도 있다.

 

신규 브랜드 책임자가 유일하게 최고 경영자의 의도를 아는 방법은 런칭 멤버를 살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력의 구조를 통해서 경영자의 관심과 조직 내에서 ‘신규 브랜드’가 갖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신규 브랜드를 위해서 내부 다양한 팀의 A급 인력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내부의 B급 인력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외부 인력으로만 구성되어 있는가? 최고 경영자의 ‘패밀리’가 들어가 있는가? 최고 경영자의 오른팔이 하는가? 컨설턴트들과 함께 하는가? 끝으로 내부 조직원들은 내가 신규 팀에 들어간 것을 부러워하는가? 시기하는가? 아니면 불쌍하게 여기는가를 보면서 신규 팀의 미래를 알 수 있다.

 

 

대기업에서의 신규 브랜드 런칭은 좌천이라는 말이 있다.
내부 직원들은 새로운 브랜드가 성공적으로 런칭되길 바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일단 신규 브랜드가 잘 되면 기존에 존재하던
자신의 브랜드의 자원과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에 안 되길 빌곤 한다.

 

 

현재 내가 다니는 회사는 패션, 잡화 그리고 작은 홍보대행사를 가지고 있는 중대형급 기업이다. 이 회사에 오기 전에는 한국 20대 대기업의 전략기획팀에서 나름 인정받고 똘똘하게 일을 하는 시장조사 팀원이었다. 대기업의 특성상 ‘전략과 기획’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회장의 그늘 아래에서 열심히 충성 성분 파악과 세뇌 교육을 받는 혈기왕성한 친위대들이었다. 그곳은 신규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인큐베이팅 시스템으로서 임원들이 성공을 통해서 별을 다는 능력과 태도의 훈련장이었다. 우리 팀에서 가장 뛰어난 상관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한민형 차장이다. 그의 이름 앞에서는 항상 최’자가 달려 있었다. 최고 승진, 최고 대우, 최다 런칭, 최초 기획 등. 나에게 우상이었던 한민형 차장은 IMF 때 갑자기 구조조정 본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일종의 사람들을 정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일을 싫어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처리했다. 너무나 깔끔하고 숙련되게 사람을 내보냈다. 그리고 한 차장도 모든 일을 마치고 사표를 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누군가는 해야했던 일이었기에 회사를 위해 자원해서 그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친구 몇 명과 함께 회사를 만들었다.

 

신규 브랜드를 기획하던 우리 부서는 통째로 날라갔다. 나는 다른 회사에 취직을 했고, 어느 날 헤드헌터를 통해서 한민형 차장이 세운 기업을 소개를 받았다. 나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일은 한민형 이사(이 회사에서는 총 네 명이 이사직을 맡고 있는데 모두 친구다)와 함께 신규 브랜드를 기획 및 런칭하는 일이었다. 총 7개의 브랜드를 런칭했고, 그 중 2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공적이었다.

 

어느 날 한 이사는 나를 불러놓고 자신이 잠시 쉬기 위해서 회사를 떠난다고 말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친구 네 명과 공동 대주주이며, 이 회사의 좌뇌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데 어떻게 갑자기 떠난단 말인가? 사실 그 이면에는 네 명의 동업자들간에 일어나는 비전 갈등, 주도권 장악 그리고 본전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결국 돈과 권력에 관한 문제였다. 전략 기획을 맡고 있는 한민형 이사와 브랜드 관리를 맡고 있는 박성필 이사 그리고 인사를 담당하는 최현식 이사와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김형수 이사간의 의견 충돌이이었다. 우회상장, 브랜드 다각화, 부동산 취득, 실패한 신규 브랜드의 원인에 대한 입장차이, 각자 경영에 대한 다른 비전과 원칙 등이 성장을 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김형수 대표이사는 중립이라고 말했지만 암묵적으로 박성필 이사의 의견을 지지 했고, 한민형 이사와 박성필 이사간의 충돌은 비공식적, 나아가 공식 석상에서도 직원들이 느낄 수 있을 만큼 불거졌다. 결국 한민형 이사는 충돌보다는 안정을 위해 일선에서 물러났다. 어떤 거래와 조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 이사의 일을 대행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니깐 차장이 임원의 보직을 맡게 된 것이다. 아마 브랜드 런칭과 기획에 관한 내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한 이사와 같이 퇴사하거나, 다른 회사로 이직 할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안정장치라고 생각했다. 없던 직무수당이라는 것도 만들어서 나를 잡아 두려 노력했다.

 

 

항상 그렇지만 그림은 멋지게 그릴 수 있다.
그러나 미래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기에
상상과 현실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갈등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진짜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상관에게 벌어진 불행이 나에게는 반사 이익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 이사가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을 접하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상황에도 내 이익만 챙기려는 나 자신의 이기심에 대한 실망감이 몰려왔다. 원래 나는 이런 기회주의자적인 마음을 지니고 살아왔던 것일까? 아니면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항상 ‘기회’만을 찾아 다녔던 이유로 머리가 그쪽으로만 진화 된 것일까? 결국 나는 돈과 권력 그리고 기회를 동시에 얻게 되었다. 예상대로 박성필 이사는 자신이 생각했던 기회 시장에 대하여 나에게 조사 및 전략을 기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기업에서의 신규 브랜드 런칭은 좌천이라는 말이 있다. 내부 직원들은 새로운 브랜드가 성공적으로 런칭되길 바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일단 신규 브랜드가 잘 되면 기존에 존재하던 자신의 브랜드의 자원과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에 안 되길 빌곤 한다. 그렇다. 바로 질투다. 그래서 신규런칭을 통해서는 인생, 아니 인간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술과 도박을 할 때 그 사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위기에 대한 본능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신규 브랜드를 런칭할 때도 위기에 몰린 사람의 본질과 본성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매력적인 시장, 트렌드의 거대 물결, 경쟁자의 약점 발견, 시장의 이동 등 외부적인 변화 요인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내부의 반목, 질투 그리고 오해로 인해서 외부의 변화를 추월하지 못하면 결국 도퇴 혹은 공중 분해되고 만다. 신규 브랜드를 런칭하는 과정에서는 절대로 정치적이 되지 말아야 하지만, 대부분의 신규 브랜드들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순수하게 비즈니스의 목적 아래 시작되었다고 (겉으로) 말하긴 하지만 사람들마다 참여하는 목적과 과정이 다르고, 각자 다른 결과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중간중간 발표하는 런칭 보고서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지뢰들이 숱하게 터지게 된다. 경험에 의하면 런칭 성공의 우선 순위 중에서 최고의 절대 조건은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열정, 바로 브랜드 런칭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과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겨우 성공하거나, 작게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런칭의 용기와 무지 사이에서

새로운 신규 브랜드를 런칭하려는 이유는 소위 말하는 글로벌 패스트 패션(Global fast fashion) 브랜드인 ZARA, GAP 그리고 H&M으로 이루어진 빅3들이 한국에 입성했거나 곧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빅3가 잘되면 이것을 표방하는 수많은 해외 브랜드들이 물밀듯이 들어 올 것이다. 이미 스포츠 시장에서는 나이키를 비롯한 해외 브랜드가 시장의 주도권을 가진지 오래다. 세계 섬유 수출 강대국이라고 말하는 한국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단 한 개의 브랜드도 미국을 비롯한 OECD국가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

 

이번 신규 브랜드 런칭에서는 3단계 확장 모델을 기획했다. 1단계는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런칭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브랜드를 만들어 중국인 파트너와 합자해서 미국으로 런칭하는 것이 2단계이다. 3단계는 미국의 파트너와 합자해서 다시 유럽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항상 그렇지만 그림은 멋지게 그릴 수 있다. 그러나 미래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기에 상상과 현실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한민형 이사가 나간 다음에 나는 그분이 했던 일을 대신하면서 신규 패션 브랜드를 준비했다. 하지만 바로 박성필 이사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차윤희 과장이 신규 프로젝트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녀의 직급과 기능으로 볼 때 적절하게 합류된 팀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에서 생각해보자면 나의 업무를 감시, 보완, 저장 그리고 내가 퇴사하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일종의 플랜 B를 진행할 책임자로 박성필 이사가 내세운 것이다. 그녀는 내가 했던 시장 조사에 대해서 처음부터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 보고서의 결론은 온라인 전용 브랜드를 만들자는 것이네?”

나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차윤희 과장을 노려 보았다.

“통계와 트렌드의 추세를 본다면 온라인 중심으로 브랜드를 만들어야 됩니다. 사업설계와 브랜드 설계를 모두 온라인 기반에서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차윤희 과장은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톤으로 나에게 몇 가지의 중요한 수치를 보여 주었다. 나는 보지 않았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다.

“차윤희 과장은 IT 기반에 있다가 오니 패션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나는 보고서를 자세히 읽지 않았다. 결론만 쳐다 보았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부하들에게 하는 고약한 상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유치한 반응이며 주장이었다.

 

미래는 알 수 없다. 미래를 알려고 할 때 사람들은 예측, 예감, 예상 그리고 상상을 통해서 막연히 추측을 한다. 그러나 과거의 데이터를 통해서 미래를 규정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미래는 이래야만 돼!’라며 자신을 신이라고 믿는 사람으로서 과거를 숭배하는 사람들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라는 관조적인 생각으로 트렌드도 돌고 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나도 이런 사람 중의 하나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지만 차윤희 과장의 주장을 반론하기 위해서, 정확히 말하자면 반론하고 싶어서 이런 말(당신은 과정의 경험이 없으므로 미래를 알 수 없다)을 했다.

 

신규 런칭은 과거의 확장, 새로운 미래의 준비, 현실의 변경 등 그 목적이 다르면 당연히 전략도 달라야 한다. 우리가 실수 했던 것은 빅3(ZARA, GAP, H&M)를 방어하기 위해서 신규 브랜드를 생각했던 것이다. 빅3는 미래가 아니었다. 우리팀은 그들이 만들어갈 시장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지 우리가 만들어야 할 시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사실 아무리 뛰어난 전략가도 자신의 지식,
경험에 의해서 방향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가장 무서운 것은 ‘직관’에 따른 결정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너무 추상적이야!” 나는 차윤희 과장을 쳐다 보았다.

“보고서의 결론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차윤희 과장의 대답은 답변이 아니라 나의 주장에 대한 강한 불만의 표시였다.

“빅3의 출현으로 인해서 가격대비 품질 만족Q/P은 더욱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없어요. 지금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가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검증 받지 않은 시장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검증이 필요하지 않나? 단순히 새로운 시장에 들어가야 된다고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냐고?”

“소비자의 니즈는 변화하고 있어요.” 차윤희 과장이 말했다.

“변화는 브랜드가 주도하는 것이야. 강력한 브랜드가 변화를 주도한다고, 그런 차원에서 차 과장이 만들려고 하는 브랜드는 반응형 브랜드이기 때문에 시장을 주도할 수 없어.”

“모든 브랜드는 소비자의 욕구와 변화를 따라야 되지 않나요?”

“소비자의 욕구와 변화를 따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 만들고 주도해야 돼.”

 

신규 브랜드 런칭의 회의는 대부분 ‘회의’를 위한 ‘회의’가 많다.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알아야 하고 그리고 우리 모두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로 회의 시간을 보낸다. 어디로 갈 것인가에 관한 것은 최고 경영자의 결심이며,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은 전략가들의 몫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영자는 방향에 대한 의견도 전략가에게 묻는다. 사실 아무리 뛰어난 전략가도 자신의 지식, 경험에 의해서 방향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가장 무서운 것은 ‘직관’에 따른 결정이다. 특히 경영자와 전략가들의 ‘직관’이 같을 경우에 결정과 그것을 실행하는 행동은 속도가 난다. 하지만 대부분 직관에 의한 결정은 시간에 따라서 그리고 다른 조사 보고서에 의해서 쉽게 흔들린다. 사실 흔들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흔들리지 않을 때다. 돌이켜볼 때 차윤희 과장의 신규 브랜드 기획의 근거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소비자의 욕구였고, 나의 근거는 소비자가 아직 모르는 욕구였다.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차윤희 과장의 이야기에 대해서 동감하는 부분은 이론적으로 완벽했다는 사실이다. 반감이 있던 부분은 완벽한 이론을 만들려고 중요한 것을 버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차윤희 과장이 버린 것은 무엇일까? 아니, 인식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신규 브랜드를 런칭해 본 사람이라면 ‘타이밍과 전략’이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관계의 재설정

한민형 이사는 나에게 특별한 분이다. 그 특별함에 대해서 딱히 뭐라고 정의할 수 없지만 일종의 ‘라인’이라고 느끼는 것이 가장 적당한 관계일 것이다. 혈연, 학연 그리고 지연도 전혀 없이 자신과 비슷하다라는 이유만으로 챙겨주었다. 어쩌면 그의 눈에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측은함과 동정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분을 모시고 회사 생활을 할 때는 겁없이 헤집고 다녔던 것 같다. 한민형 이사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강점을 다 붙여 놓은 그런 기계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일상적인 매너에서부터 실수를 처리하는 것까지도 완벽한 그였기에 회사에서는 대표이사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그런 존재였다. 2~3번의 전략적인 실수도 있었지만 다음 번에는 더 큰 성공으로 만회했기에, 처음에 했던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일종의 성공을 위한 연습 정도로 취급되었다. 간혹 직속 부하직원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한 이사가 그들에게 교훈을 얻기하기 위해서 일부러 실수를 범하게 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를 향한 신뢰는 신앙 수준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직원이 바로 나였다. 나는 항상 한 이사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고, 모든 출장에 동행했으며 간혹 회사와는 전혀 무관한 주제로 회사 주변에 있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는 직원들의 부러움의 정도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회사가 한 이사를 포함한 네 명의 이사들에 의해서 팽팽한 긴장감으로 흘러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동업의 성공은 신화와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이 네 명이 헤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시간문제라고 생각 했다. 한 이사가 홀연히 휴직계를 쓰고 세계 여행을 떠난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엇갈린 주장과 그에 얽힌 흉흉한 소문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만약에 한 이사의 휴직 조짐이 있었다면 몇 명의 사람들도 같이 움직였을 텐데, 갑작스러운 그의 휴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황당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남긴 것이다. 퇴사도 아니고 휴직으로 그것도 어제 신규 런칭 회의를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미국으로 사라지다니….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많은 사람들이 한 이사의 의견에 동조하는 동반 퇴사 등의 회사 자체가 더 불안해질 것을 대비한 묘수였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전혀 인간미가 없는 철저함으로 무장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나에게 심리적으로 가장 큰 적이 되었다. 어쩌다가 내가 그분의 비교치가 되었을까?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지 한 이사의 보고서와 비교됐으며, 무엇이든지 한 이사가 한 행동과 비교당했다. 한 이사에 대한 원망이 나에 대한 반감으로 표출되는 것 같았다. 사장은 나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박성필 이사는 내가 낸 보고서에 대해서 늘 의문을 가졌다. 결국 나의 가장 든든한 백이었던 한 이사는 나에게 가장 큰 적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견딜 수 있을까?

 

 

 

 

모략과 모험

“그러니까 불가리의 확장 프로그램과 같은 브랜드 런칭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이야기군.”

 

사장은 흡족한 얼굴이었다. 흡족할 수밖에 없는 보고서였다. 검증되고, 안정되며, 전략적인 동시에 무엇보다도 미래의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나의 신규 런칭 보고서였다. 불가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시계 시장’에 먼저 들어가서 브랜드가 되어서 주변 영역으로 확장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장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것에 관심이 있고, 어떤 것에 자극 받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이사는 나의 이런 보고서 형식에 대해서 지적 성감대를 자극한다는 칭찬인 동시에 경고를 준 적이 있었다. 수단으로 탁월하지만 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할말은 있다. 이 모든 것은 철저히 한 이사의 것을 보고 배운 것이다. 나름대로 철저히 분석해서 내 것으로 만든 것뿐이었다. 자신의 보고서와 닮았다는 것을 느낀 한 이사도 결국 경고와 칭찬을 동시에 하는 암묵적인 인정으로 나의 보고서에 대해서 지나친 경고의 표시는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사자이든 고양이든지에 상관없이 새끼들은 모두 ‘야옹’거리면서 운다. 갓 태어난 새끼들의 크기나 노는 행위들은 비슷하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처럼 브랜드도 시간이 가면 달라지는 브랜드를 설계해야 한다. 시계의 경우가 이와 같다. 비록 브랜드로서 인식시키고 만들어가기는 어렵지만 일단 브랜드가 되면 그 파워는 다른 브랜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력해진다. 문제는 과연 우리나라에서 시계 브랜드를 런칭하는 시점이 완벽한가이다. 신규 브랜드를 런칭해 본 사람이라면 ‘타이밍과 전략’이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신규 브랜드의 기획자는 시장의 밀물과 썰물, 트렌드와 라이프스타일의 ‘시점’을 읽어 내야 한다. 과연 어떤 시장이 몰락하면서 어떠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가는가, 그리고 아직 그 시장에 없는 브랜드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의 전체 흐름을 읽어야 한다.

 

티파니라는 브랜드는 다이아몬드를 파는 브랜드이지만, 예전에는 도자기를 비롯한 아시아와 유럽의 진귀한 물건을 파는 귀금속 편집샵이었다. 남북전쟁 때는 군복과 총, 그리고 칼을 파는 무기 가게였던 적도 있었다. 개인의 예술적 가치를 파는 브랜드가 아니라면 시대의 흐름에 맞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가 하나는 자동차를 사는 것이고 또 하나가 시계를 차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명품 시계가 없다. 사실 장영실의 후손을 찾아가서 브랜드의 히스토리까지 완벽하게 구현된 보고서를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아이디어 차원에서 끝났다. 따져 본다면, 스위스 게르만 족의 후손들은 북극성을 보고 그 위치를 알아낼 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때부터 물, 해, 달로 그 절기를 알아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역사는 있되, 상품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명품을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박성필 이사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의 의도는 많은 시간을 들여 브랜드를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타당하지 않다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질문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는 브랜드를 만드는 것을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한 ‘공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민형 이사와는 생각이 크게 달랐고, 나의 생각과도 달랐다. 신규 브랜드 런칭에 최대의 고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내부의 실권자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브랜드에 민감한 남성들이 우리나라 브랜드를 브랜드라고 인정할까? 남성의 패션에 민감한 사람들이 과연 우리나라 준 명품 시계에 대해서 관용도가 높을 것이라 생각하나? 그렇다면, 지금 박차장이 차고 있는 시계는 어느 브랜드 인가?” 박성필 이사는 질문을 하면서 천천히 주변의 시선을 살펴보고 있었다.

 

박성필 이사는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흔들기로 작정한 듯이 전혀 예상하지 않은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고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나의 실수였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 보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해서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보고서를 함께 만드는 차윤희 과장에게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 보고 받는 자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 보고를 할 때는 사전에 ‘조율’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일종에 의견 수렴일 수 있는 행위이다. 사실 의견 수렴이라는 장치는 실제적으로 의사 결정권자들의 의견에 관한 존중의 의미가 더 크다. 보고서를 만들기 전에 먼저 박성필 이사와 방향에 대해서 조율을 했어야만 했었다. 보고서의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목적, 전략, 방향 그리고 원칙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함께) 정답처럼 만들어 갈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멋진 전략서를 만드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멋진 합의를 도출하는 기술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었다. 표현이 거칠지만 ‘반격’인가 ‘항복’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반격을 하는 이유는 나의 의사를 강력하게 전달해서 ‘이미지’를 확실히 굳히는 것이다. 사실 임원과의 갈등에서는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흔들리면 차윤희 과장 앞에서 계속 무너질 것이고, 새로운 팀에서 나의 리더십도 무너질 것이다. 박성필 이사의 질문에 대해서 보완한 다음에 다시 보고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물론 이 방법이 이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긴 하지만, 이것 또한 돌이키지 못하는 길을 가는 것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생각 없는 전략가는 조직에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전략’으로 런칭하기 전에 조직에서 ‘공감’으로 런칭하지 못했다.
당황할 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논리와 전략이 없는 궁색한 변명이 될 수 있다.

 

 

“명품을 만드는 시간은 트렌드를 활용해서 줄일 생각입니다.”

“트렌드를 만드는 것과 명품을 만드는 것이 정비례라고 생각하나?” 박성필 이사는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정확히 내 머리에 맞추었다.“어떤 브랜드건 제대로 된 브랜드를 만드려고 한다면 최소 3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3년이면 명품 시계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는가?”

“저는 명품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과정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시계 브랜드를 만들 때 우리는 새로운 타깃, 시장, 전통적인 프로모션보다는 처음 이미지를 통해서 브랜딩을 하는 과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나는 3년 안에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만들 브랜드가 가짜 명품 시계인 ‘빈센트앤코’나 ‘지오 모나코’따위의 상황을 맞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아무리 스위스제 무브먼트를 사용하고, 제네바에서 조립할지라도 결국 흉내만 내는 짝퉁 명품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오히려 시계를 통해서 브랜드를 만들려면 10년 준비에, 50년 관리는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진 것이었다. 나는 ‘전략’으로 런칭하기 전에 조직에서 ‘공감’으로 런칭하지 못했다. 당황할 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논리와 전략이 없는 궁색한 변명이 될 수 있다. 준비되지 못한 대응은 함정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박 이사는 모든 것을 준비하고 나를 맞이했다. 나의 의견을 존중하는 한 이사에 길들여진 나는 회의석상에서 무참히 ‘도륙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들은 처음부터 목을 물지 않는다. 뒷다리와 엉덩이부터 공격을 한다. 물소는 계속 도망가려고 하지만 피의 냄새를 맡은 흥분한 사자들은 본능적으로 끊임없이 뒤를 공격한다. 왜 물소는 자신보다 3배나 작은 사자들의 공격에 당하기만 할까? 바로 맞서서 뿔로 받아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두려움 때문이다. 약자는 본능적으로 공격하는 것보다, 도망가게 되어있다.

 

“제가 보고한 보고서가 가짜 브랜드를 만드는 매뉴얼처럼 생각되십니까?”

“…….” 박성필 이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 침묵도 계산된 것이었다.

“그럼 박 이사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해야만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는 상대하지 않고 내가 덫에 걸려서 허둥거리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도박처럼 하는 런칭, 그리고 런칭의 도박

며칠이 지나자 임원단은 내가 세운 전략서를 받아 들여 브랜드를 런칭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계가 아니라 주얼리였다. 불가리의 런칭 및 확장 전략을 통째로 받아 들이기로 한 것이다. 불가리는 주얼리로 탄생되었고, 자연스럽게 진화된 브랜드였다. 과연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어쨌든 주얼리는 나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보석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차윤희 과장에게 완전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또한 주얼리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원석의 크기와 성분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지는 특징이 있었다. 그렇게 나의 런칭 전략은 불안하게 시작되었다.

 

석달 뒤에 신규 브랜드의 런칭 보고는 다시 시작되었다.

 

 

 

 

“주얼리의 가장 큰 장점은 악성 재고가 생기면 그대로 녹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는 뽑아서 다시 세팅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이 사업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 일 것입니다.” 차윤희 과장은 성공 방향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힘들었던 것은 과거 내가 주장했던 방향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시계 브랜드 런칭을 위한 조사 결과와는 상이하게 나왔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초반에는 명품 시장에 관한 것이었고 이번에는 대중 시장에 관한 조사였기 때문이었다. 조사라는 것은 무엇을 조사할지, 그 초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바뀌어진다. 나는 시장 중간 보고서가 나왔을 때 사표를 제출했다.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한민형 이사와 사장의 강력한 만류로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이것 또한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과정도 박성필 이사의 의도대로 흘러간 것이었다. 이 상황을 무협지나 3류 조폭 영화처럼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박성필 이사가 처음에 나를 공격한 것은 내가 복종을 통해서 자신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내쳐야 하는지에 관한 일종에 테스트였던 것이다.

 

어쨌든 명품 시계 시장은 성장하고 있었지만 중가의 국산 브랜드는 전멸한 상황이었다. 고가의 명품 시계를 원하는 남성들은 브랜드에 매우 민감한 층이다. 이들은 패션과 트렌드 보다는 ‘전통’이라는 그 브랜드 가치를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다. 확실히 주얼리 시장은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브랜드 런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의 물결을 따라서 흘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현란한 숫자의 배열로 인해서 가히 공학적 통계라고 말하는 보고서는 믿지 않는다. 통계에 의한 데이터는 문제를 객관화시켜 버린다. 그냥 소비자들의 불만을 이해할 수 있는 숫자로 평평하게 보여준다. 5점 만점의 척도에서 만족도 1과 만족도 2 사이에 일어나는 복잡한 상관관계의 기준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1.5?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소비자의 반응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나는 신규 런칭 브랜드를 찾는 방법으로 ‘불만족한 소비자’를 사냥개(이런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점잖지 않지만)처럼 사용한다.

 

 

 

 

 

 

소비자가 터트린 불만은 지금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브랜드들의 약점들이기에 때문에 이것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먼저 가설을 세워서 모형을 만들고, 통계적인 조사는 확인을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정말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 믿나요?” 차윤희 과장은 나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과거의 데이터가 가장 정확한 미래의 모습이지.” 나는 10년 동안의 매출 누적 자료를 차윤희 과장 보여 주었다.

 

흔히들 시장 맵이라고 불리는 브랜드 위치도는 마케터의 가장 핵심 능력이다. 왜냐하면 원의 크기와 위치를 그리는 것은 직관에 의한 예술이 아니라 관찰에 의한 기술이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선생이 우리나라를 직접 발로 돌아다니면서 점을 찍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의 지도와 맞추어보면 신기할 정도로 맞아떨어지는 정밀한 아날로그 지도이지만, 분명 오차도 있을 뿐더러 그 지도로는 도로를 만들 수 없다. 즉, 마케터가 그린 그림들은 절대로 시장의 크기와 위치를 1:1로 그대로 찍은 항공사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지도가 대동여지도이다. 자신의 경험, 자료, 취향 그리고 소망에 따라서 그림은 조금씩 다르거나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시장 상황을 보기 원하는 투자자나 경영자들을 위해서는 어설픈 그림이라도 꼭 만들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그림을 그린 나 조차도 나의 그림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스케치일 뿐이다.

 

“주얼리 시장은 읽었지만, 여성의 심리는 읽지 못한 것 같아요.” 차윤희 과장은 나를 쳐다 보았다.

“무슨 말인가?”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삶의 기준이 바뀌었다고요!” 차윤희 과장은 나의 리포트를 보면서 23개의 틀린 점을 지적했다.

 

 

 

 

 

 

 

오히려 믿는 그림이 있다면 소비자들이 직접 만들어가는 그림이다. 소비자 연구 과정의 일부로서,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종류와 컨셉의 이미지를 주고 그 이미지를 우리가 생각하는 브랜드 이미지의 아웃라인에 붙이게 하는 것이다. 붙였다고 끝이 아니다. 그것을 왜 붙였는지 물어 보고, 그들의 불만이나 만족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 사실 이것만 가지고 브랜드 이미지의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모호하지만 희미하게 시장의 윤곽을 볼 뿐이다. 윤곽을 살펴보면서 특징을 보게되고 그 특징을 보면서 전체적인 구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용기와 지혜

“지금까지 준비한 것이 아깝지 않나요?” 차윤희 과장은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런칭을 준비하면서 이토록 서로를 진지하게 쳐다 본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깝더라도 금값이 계속 올라가면 누가 신규 브랜드의 고가 골드 주얼리를 사겠어? 불 보듯 뻔한 런칭이지. 3개월 동안 계속 금값은 올라가고 매출은 일어나지 않고 결국 브랜드는 중도에서 막대한 부채 안고 쓰러진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잘 준비했잖아요?”

“금값의 폭등에 대해서는 준비하지 않았어. 그리고 정말 실버 쪽으로 트렌드 자체가 옮겨가고 있다고. 하나의 패션 트렌드 추세인줄 알았는데…. 상황이 달라졌어.”

“그래도 이것을 그대로 접었을 경우에… 투자했던 자원과 노력이….”

“하지만 경영자도 지금 우리가 직면한 최악의 경우는 알고 있어야지. 마지막 그림을 보고 그것에 대한 결정이 필요하잖아.”

 

차윤희 과장과의 관계가 애매모호해졌다. 5개월(2,400시간) 동안 같이 살았다라는 표현이 더 잘어울리 것 같다. 분명 그녀는 박성필 이사가 보낸 ‘감시자’와 같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보완해주는 그런 조력자가 되었다. 물론 차윤희 과장과는 전혀 반대로 김주환 과장은 박성필 이사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산업 스파이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는 하루하루의 일정에 대해서 박성필 이사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엉뚱한 실수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 김 과장은 포털 사이트 메일을 보낸 뒤 로그아웃을 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퇴근해 버렸던 것이다. 나는 사무실의 불을 끄다가 그의 메일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사실 ‘우연히’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블랙 코미디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어쨌든 모든 상황을 뒤엎을 만한 ‘운명적’인 사건이 되어 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성필 이사의 머리 꼭대기로 올라 간 것이다. 마지막 카드로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즐길 것인가? 나는 나의 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김주환 과장은 나의 계획대로 천천히 압박하는 스트레스의 강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한달 안에 사표를 쓰고 나가게 되었다. 이제 한달 후면 런칭을 하고 그것으로 나와 이 회사는 평가 받게 될 것이다. 물론 초조하지만 예상되는 모든 상황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풀어나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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